[스타에이지] 모든 거래에는 공정한 질서가 전제 되어야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시장에는 불공정이 만연해있다, 가장 문제되고 있는 요체가 독과점이라고 본다. 인간의 탐욕이 공정한 질서를 붕괴시킨 지 이미 오래 전 일이다.
그래서 1930년 스웨덴 에서는 “포용적 성장”을 기치로 경제민주화라는 새로운 과제를 선택하게 되었다. 갈수록 집중화하는 경제력을 어떻게 견제하고 수평적 경영을 도입할 수 있는지가 지금의 자본주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최대의 명제다. 제4차 산업혁명은 이미 시작되었다고 한다.
1, 2차 산업혁명이 Off Line 선상에서 물질의 혁명이였다면 3차 산업혁명은 On Line 선상에서 디지털화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Off Line 과 On Line을 연결하여 “시간+공간+사람(Velocity+Scope+SystemImpact)" 이 만드는 지적능력을 가미한 경제주체가 바로 4차 산업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세계는 더욱 좁아지고 이른바 국경을 초월하는(Transnational) 경제활동과 다국적기업이 부상할 것이며 제조업 몰락으로 전 세계의 무역물동량이 감소하면서 기술독점의 시대는 끝이 나고 초저금리로 금융업은 빅뱅이 일어난다고 많은 학자들은 예고한다.
또한 앞으로 10년 후(2025년경) 모든 영역이 공유경제로 예속되고 자아실현을 위한 인간의 치열한 경쟁은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이러한 대변환의 시대를 맞이하여 우리는 이제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다.
필자는 진부한(hackneyed) 자본주의 역사를 논하고 싶지 않지만 최근 “21세기 자본론” 으로 뜨거운 논쟁을 제기한 프랑스 파리 경제대학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 교수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자본주의 때문에 소득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경제성장의 70%가 상위10%의 몫이 되었고 그 대부분이 1%의 품에 들어갔다고 말한다.
이 과도한 심화는 결국 경제의 양극화현상을 초래했다며 1870~2010년 데이터를 통해 분석하고 있다. 즉 자본주의적 시장경제가 완벽하게 작동할수록 자본의 수익률 만 증가하여 소득 불균형이 한층 심화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불평등의 해결방안으로 그는 부를 독점한 계층에 대해 80%정도의 한계세율을 적용 약간은 징벌적 세금을 부과하는 자본세를 들고 나왔다. 보수 쪽 학자들은 사회주의적 냄새가 난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일부가 과장되었지만 시대정신을 환기 시켰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평가했다.
경제성장 논자인 작년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엥그스 더틴은 그의 저서 “위대한 탈출”에서 불평등은 성장의 산물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사람이 동시에 부자가 될 수 없다. 불평등은 차례로 발전에 영향을 미치는 좋은 것 일수도 있지만 승자가 따라오는 사람을 막기 위해 사다리를 치우는 행위는 아주 나쁜 것 이라고 설파하고 있다. 그러면서 더틴은 성장이 정체될 때 불평등이 심화되며 성장을 질식시키는 불평등 해결방안은 곤란하다고 경계하고 있다.
하지만 피게티 교수는 자신이 19세기 사회주의 창시자인 카를 마르크스와 비교되는 것을 극도로 부인하면서 불평등 자본주의 문제를 진단하고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사회주의경제는 20세기에 이미 몰락한 독재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시장주의만으로는 해법이 될 수 없다며 양극단을 배격하고 있다.
피케티는 자본주의경제가 성숙할수록 부의집중은 가중되다는 것을 수치를 통해 증명해 보인다. 결국은 자본주의경제의 역동성을 저하시키며 발목을 잡는다고 말한다. 필자도 같은 맥락에서 부와 소득의 집중은 많은 사회적 문제를 동반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최근 국회에서 활발한 논쟁거리인 “부자증세” 와 “초과 내부유보세”가 이를 반영한다.
이를 실현하려면 세법을 개정하고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고 신자유주의 바람을 잠재우기 위하여 다시 케인즈 식으로 돌아 갈수는 없는 일이다. 정책방안의 현실성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자칫 정치권과 학계에 이념대립으로 비화할 가능성마저 있다. 바로 이런 한국경제의 제반 상황이 피케티교수의 담론에 대한 찬반과 논쟁의 딜레마가 있다. 그래서 필자는 우리의 자본주의 역사와 오늘의 시대흐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한국의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들어선 시접이 1960년대 이후라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하지만 한국은 다른 선진국보다 발전 속도가 훨씬 빨랐다. 그래서 한국의 대표적인 진보경제학인 고려대 장하성 교수는 그의 저서 “한국 자본주의”에서 피케티 교수의 소위 불평등 문제에 대한 해법은 한국에서는 결코 맞지 않다고 지적한다.
또 다른 경제학자들도 배 아픔 정서를 부추기는 피케티의 주장은 상대적 빈곤격차에만 주목하는데 상대 소득의 문제는 경제가 아무리 발전해도 해결 될 수 없다며 상대적 평등을 지향하는 정책은 경제를 퇴보시켜온 것이 인류역사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1%의 상위소득 구룹은 항상 수시로 주인이 바뀌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불로소득에 기인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한국에서도 다른 선진국들과 마찬가지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소득불평등과 양극화의 심화 그리고 고용 없는 성장 등의 문제점이 드러났지만 이러한 모순의 원인과 과정은 선진국과는 다르다는 것이 장교수가 주장하는 핵심이다.
1995년 자율적 시장경제로 전환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정부는 생필품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다방 커피값까지 정부가 통제하는 계획경제를 30년 이상 정책의 기본틀로 진행했고 그리고 성장도 했다. 그후에도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는 관행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장 교수는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 전환한 결과 경제 권력이 시장으로 이동된 것이 아니라 재벌로 이동됐다”고 말한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시장경제를 제대로 해볼 기회가 없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장교수는 “피케티의 자본세”는 한국을 포함한 신흥 시장국가들에서는 불평등 완화에 효과를 거두기가 힘들고 세금을 거두어 재분배하는 정책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결론이다. 장교수는 “정의로운 자본주의” 주창하면서 “노동으로 삶을 꾸리는 절대다수의 국민들이 민주적인 정치절차를 통해 자본가들이 올바르게 행동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고 조언하고 있다.
정의로운 자본주의는 우리 헌법조항에 “경제민주화” 라고 명시되어있다. 박근혜 대통령 후보시절 경제교사로 알려진 서강대 김광두 교수, 그리고 경제민주화 밑그림을 그렸던 김종인 의원 (민주당 전 대표)의 충정이 빛을 보지 못하고 창조경제의 위세에 눌려 꼼짝을 못하고 있다. 지식정보사회에서 창조경제사회로 이동하는 페러다임은 아주 적절할 수 있으나 한국경제를 견인할 한사람의 영웅탄생이 아쉽기만 하다.
지금 한국경제는 전반적으로 큰 위기에 처해있다. 엄청난 가계부채에서부터 저출산 고령화와 일자리 그리고 노사갈등 등 사회적 양극화에 이르기까지 총체적 부실이다. “위기는 기회다”라는 말이 있듯이 그래서 필자는 우리경제의 기초체력을 다지기 위하여 국가의 모든 역량을 재결집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 해답은 오직하나 산업화, 민주화, 정보화 과정에서 잘 짜여 진 프레임을 경영할 수 있는 경쟁력을 겸비한 비정치적 인재를 발탁해 적소에 적기에 등용하는 길이라고 말하고 싶다. “김영란법“이 시행되므로 부패가 잡힌다면 시장경제도 바르게 자리를 잡아야 모든 경제학자들의 우려가 사라질 것이다.
“인사가 만사다”란 의미가 이처럼 크게 떠오른 것은 필자만의 생각도 아닐 것이다.
저작권자 ⓒ 스타에이지,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