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 연설문 검열 사건으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실망감이 최고조에 이르면서 곳곳에서 '탄핵'이나 '하야' 등 극단적인 말들이 쏟아지고 있다.
최씨가 수년간 대통령 연설문 등 극비문건들을 넘겨받아 사실상 사전 검열해온 것이 드러난데 이어 25일에는 "최씨가 박 대통령한테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시키는 구조"라는 최씨 측근의 인터뷰 내용까지 공개되면서,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범국민적인 '멘붕' 상태에 빠진 모습이다.
'봉건시대에도 있을 수 없는' 사태 발생에 실망이나 분노를 넘어 국가적 위기상황 도래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튀어나고 있다.
"최순실이 전쟁하라고 하면 전쟁도 터지겠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는 헌법 제1조를 바꾸려고 개헌을 선언한 것 아니냐" 는 등 '서늘한' 농담이 어색하지 않게 오간다.
박근혜 대통령이 25일 청와대 출입기자들 앞에서 읽은 문건의 제목은 '국민께 드리는 말씀'이었다. 내용도 사과문이나 진상 고백서가 아니었다.
박 대통령은 "최순실씨는 과거 제가 어려움을 겪을 때 도와준 인연으로 지난 대선 때 주로 연설ㆍ홍보 분야에서 저의 선거운동이 국민에게 어떻게 전달되는지에 대해 개인적 의견이나 소감을 전달해주는 역할을 했다. 일부 연설문이나 홍보물도 같은 맥락에서 표현 등에서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고 했다.
연설 전문가 친구한테 도움 좀 받았는데 뭐가 문제냐는 뉘앙스가 짙게 깔려있다. 대통령의 '말씀'을 들은 국민들의 정신 상황은 한차원 더 깊은 공황상태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국민께 드리는 말씀' 이후 주요 포탈 사이트 검색어 1위 자리에는 '탄핵'이라는 단어가 꿰차고 앉았다.
이럴 때 필요한 게 강력한 리더십이다. 빠르고 명쾌하게 상황을 정리하고 갈 길을 뚜렷하게 제시해 주는 지도자가 절실하다.
물론 여당은 여당스럽게, 야당은 야당스럽게 포지션을 정하겠지만, 두 진영 모두 '리더'가 없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하는 상황이다.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는 "나도 연설문 같은 걸 쓸 때 친구 얘기를 듣곤 한다"고 했다. 자기 머리 나쁘다는 것 자랑하는 것인가, 아니면 자기하고 대통령하고 같은 걸로 아는 것인가.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제대로 진상조사와 수사를 한 다음에 국정의 신뢰를 회복하고 민생을 챙겨야 한다"는 하나마나 한 말만 한 뒤, 탄핵 관련 질문에는 "오늘 거기까지 언급하진 않겠다"고 했다. 제 1야당 대표가 무슨 역할을 해야 하는 지 전혀 모르는 분위기다.
박지원 국민의당 비상대책위원장은 "박 대통령이 조금 더 감동적인 자백을 해주시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감동 먹으면 용서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국회 국정조사를 통해 진실을 밝혀야 한다. 필요하면 특검까지 해서 엄정하게 사법처리해야 한다"고 했다. 하나마나 뻔한 이야기다. 거의 비슷한 발언을 이날 유승민 새누리당 의원도 했다. 문 전 대표는 결코 고지에 깃발을 꼽지 못할 것이라는 항간의 주장에 본인 스스로 다시 한번 힘을 실어주는 꼴이 됐다.
심상정 정의당 상임대표는 "지금 실시간 검색어 1위가 '탄핵'이고, 2위가 '박근혜 탄핵'이다. 이제 최순실 게이트는 박근혜 게이트라는 사실이 명백해 졌다"고 했다. 탄핵을 하자는 건 지 말자는 건 지 모르겠다.
안철수 국민의당 의원 또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박 대통령이 전면에 나서서 진실을 밝혀야 한다.대통령도 수사대상에 포함돼야 한다. 내각 총사퇴와 비서진을 모두 교체해야 한다"고 했다. 표정만 비장했지 대권을 노리는 야권 리더 발언치고는 영양가가 전혀 없다.
손학규 전 더불어민주당 고문은 "희대의 국기문란 사건인 만큼 국정조사와 특별검사를 포함한 법이 허용하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대통령을 비롯한 모든 관련자를 엄정하게 조사해야 한다. 대통령부터 나서서 진실 규명에 앞장서야 할 것"이라며 산에서 도 닦는 사람같은 말만 했다.
그나마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가 시원했다. "전경련에 속한 기업들에게서 900억원을 강제 모금한 건데 박 대통령은 전경련이 앞장서서 돈을 냈다고 한다. 대통령이 법률을 위배한 중대한 혐의가 있을 때 탄핵이 가능한데 이 모금 건만으로도 탄핵할 수 있다"고 했다. 다음 대선에 나오면 최소한 좌쪽의 찬동은 많이 받을 것이다.
더불어민주당은 25일 긴급 최고위원회을 열어 "내일 의원총회를 열어 최순실 게이트 특검을 당 차원에서 추진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리더십이 흐릿한 상황에서 야당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이런 것 밖에 없을 것이다. 이석수 특별감찰관이 최순실 언저리를 건드렸다가 훅 날아간 걸 불과 몇주 전에 목격한 야당이 특검이 만능인 것처럼 생각한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여든 야든 국민을 감동시킬 수 있는 리더십이 절실한 시점인데 상황이 이러하니, 차라리 박정희-양김 시대가 지금보다 더 나았다는 말이 나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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