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헌변호사의 한류와 국제법] 1. 국제거래 기본은 협상력 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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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에이지] E기업은 전자제품에 들어가는 소형 모터, 스위치 등을 개발해 생산하는 업체다. 또 통신용품, 군수용품까지 사업 영역을 확장하면서 중국에 공장도 설립했고, 미국 유럽 호주 등 국제 거래선도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김재헌 법무법인 천고 대표변호사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미국의 K인터내셔널 측으로부터 통지서를 받았다. E기업이 납기일을 여러 차례 어겼을 뿐만 아니라 공급한 물건에도 하자가 많아 손해가 막심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물품 대금을 지급할 수 없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E기업의 박 대표는 통지서를 읽는 순간 아찔했다. 지금도 납기일을 맞추기 위해 공장에서는 생산 라인이 풀가동되고 있었다. K인터내셔널에 납품하기 위해 구매한 원자재도 창고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납품 대금을 받지 못하면, 창고에 가득 쌓인 원자재를 폐품으로 헐값에 처분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박 대표는 우선 회사 자금 사정부터 파악했다. 점검 후 박 대표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자칫 잘못하면 회사가 부도 위기를 맞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K인터내셔널과 거래했던 지난 몇 년을 더듬어 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K인터내셔널로부터 항의를 받은 기억이 없다. 

박 대표는 갑작스런 K인터내셔널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부당하다면서 항의를 했다. 지금 생산하고 있는 제품을 공급받지 못하면 K인터내셔널도 큰 어려움을 겪을 것이기 때문에 제품 공급을 받기 위해서라도 대금지급을 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가슴은 계속 두근거렸다. K인터내셔널 측이 대금지급을 거부하면 회사가 부도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진정이 되지 않았다.

K인터내셔널의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K인터내셔널 측에서는 “변호사들과 충분히 상의했고, 대금지급을 거절할 법적 근거가 있으니, 마음대로 하라”는 답변만 내놨다.

박 대표는 고심 끝에 체념했다. K인터내셔널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사방팔방 뛰어다니며 수소문을 하다 보니 K인터내셔널이 이미 중국 하청 업체를 구해놨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K인터내셔널은 E기업이 납품을 거부하더라도 중국에서 물품을 구할 수 있으니 애탈게 하나도 없었다. 다급한 것은 E기업이다 보니 납품가를 후려칠 수 있을 것이란 계산 하에 움직였다는 것이 눈에 훤히 보였다.

법적으로 싸울까 생각도 해봤다. 계약에는 싱가포르 중재로 분쟁을 해결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동안 계약내용을 확인해 보지 않아서 싱가포르 중재라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하지만 불확실한 것들이 너무 많았다. 법적 분쟁을 통해서 물품대금을 다 받을 수 있을 것인지, 언제 받을 수 있을 것인지, 그동안 어떻게 생존을 할 수 있을 것인지 어느 것 하나 장담하기 힘들었다. 분하고 억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동안 K인터내셔널을 위해서 많은 양보를 하면서 개미처럼 일을 해 왔는데 이제 헌신짝처럼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지금 이 순간 회사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부도만 막자고 마음먹었다. 원자재 값만이라도 건지는 선택을 하기로 결정했다. 박 대표는 납품대금의 50%만 받으면 감지덕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박 대표는 어느 순간 생각이 일변했다. 그리고 변호사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소송은 부담스럽다…그러나 국제소송은 더욱 부담스럽다

 

박 대표는 로펌 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열변을 토했다.

“물품 대금 50%를 받는다고 쳐도 회사에는 엄청난 손실이 생깁니다. 생산라인을 유지하기 위해 들어간 전기료 및 각종 부대비용과 인건비는 하나도 건질 수 없어요. 제품 생산에 들어간 원자재 값만 겨우 챙기는 수준이지요. 그런데 K인터내셔널은 그마저도 줄 수 없다는 겁니다. 회사가 다급하다는 것을 알고 버티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번 거래를 끝으로 K인터내셔널과 거래를 끊을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부도덕함에 도저히 그냥 무릎을 꿇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강경한 어조로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피력했지만 표정에서 불안감은 가시지 않았다. 중재가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잘 모르는 외국에서 중재를 해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는다. 중재 결과가 어떻게 될지 짐작도 하기 힘들다.

박 대표에게는 비용도 부담이었을 것이다. 외국에서 법적 절차를 진행하려면 외국로펌을 선정해야 하고 또 외국로펌과 업무조율을 하고 전략을 상의할 한국변호사도 선임해야 하는데 당연히 국내에서 법적 절차를 진행하는 것보다 많은 비용이 든다. 많은 비용이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엄두를 내지 못하게 된다. 더 나아가 해외에서 분쟁을 처리한 경험이 없다 보니 어떤 변호사를 어떻게 선임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해외에서 소송이나 중재를 하면 수 개 월이 걸리거나 수 년 이 걸릴 수 있는데 그 동안에 회사가 생존할 수 있을지 여부도 염려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박 대표가 느끼는 불안감은 당연한 것이다. E사처럼 규모가 작은 기업들은 소송이나 중재를 준비하는 것만 해도 업무에 상당한 부담을 준다. 중재에 필요한 각종 자료들을 수집해야 하고, K인터내셔널의 계약위반사실을 입증할 증거도 제시해야 한다. 그러나 중소기업들은 거래 과정에서 분쟁에 대비한 일들을 미리미리 준비해 놓지 못한다. 그냥 믿음으로 거래를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K인터내셔널을 믿고 거래를 하다 보니 서류작업도 명확하지 않았다.

그동안 K인터내셔널의 납품단가 인하 요구가 ‘인색’하다고 느껴졌지만, 거래를 지속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에 거래를 끊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계속 신뢰를 보여주면 상대방도 나의 진심을 알아줄 것이라고 기대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분쟁에 접하게 되면 막막하고 어디에 하소연하기도 힘들게 되는 것이다.

변호사 입장에서 사건 진행 과정을 살펴보면 E사는 스스로 협상력을 저하시켰다. 반면 상대방은 E사의 약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 박 대표가 눈치 채지 못한 사실 한 가지

 

박 대표 입장에서는 K인터내셔널의 대금중단 압박이 ‘날벼락’ 이었겠지만 내가 변호사 입장에서 자료들을 살펴본 결과 양사의 분쟁은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었다.

박 대표는 나와 상담을 하는 중에도 K인터내셔널이 갑자기 태도를 바꾼 이유에 대해 알지 못하겠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많은 희생을 감내해 가면서 K인터내셔널이 요구하는 단가를 맞추어 왔다.

앞으로 시장 상황이 나아지면 단가를 올려 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영업이익이 거의 없어서 현상유지를 해 온 수준이었다. 이것을 K인터내셔널이 잘 알고 있을텐데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신의를 저버릴 수 있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고 회사의 앞날을 생각하면 잠이 잘 오지 않는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하지만 자료를 살펴보니 K인터내셔널은 납품단가 인하를 꾸준히 요구해왔고 품질문제에 대해서 지적을 해 왔다. 하지만 박 대표는 가격 인하 요구나 품질을 문제 삼은 것이 일상적인 가격협상 전략으로만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인내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양보를 하면 별 문제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K인터내셔널을 위해서 자기가 희생한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K인터내셔널은 자기를 신뢰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K인터내셔널 입장에서는 다르게 생각했을 것이다. 박 대표가 가격 협상에 있어 전향적인 태도 변화를 보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더 낮은 가격에 제품을 생산해 줄 기업을 찾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품질문제도 대체로 만족스럽기는 하지만 더 낮은 가격에 더 좋은 품질의 제품을 공급해 주는 업체와 일하고 싶었던 것이다.

바로 이 대목이 아쉬웠다. 박 대표가 K인터내셔널의 가격 인하 요구에 대해 조금만 위기의식을 느꼈더라면 이같은 낭패를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K인터내셔널이 박 대표와의 거래를 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면, 점진적으로 거래량을 줄여 나가거나, 혹은 새로운 거래처를 확보하려는 노력을 했을 것이다.

사실 기업 경영 측면에서도 K인터내셔널 납품 물량이 많아 리스크가 꽤 큰 편이었다. K인터내셔널이 일방적으로 거래를 끊지 않더라도 혹여 부도가 나거나 경영 악화로 대금 납부를 잘 못할 경우에 대한 대비책을 세워 놓는 것이 좋았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채권 확보 차원에서라도 K인터내셔널과 소통 과정을 문서로 기록해 두고, 변호사와 협상 전략을 준비했더라면 좀 더 수월하게 일을 진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을 대비해 놓지 않음으로써 박 대표의 협상력은 거의 제로에 가깝게 된 것이다.

클라이언트와 후배 변호사들에게 항상 강조하지만 분쟁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기지 않는다. 전조 증상이 반드시 있다. 전조 증상을 빨리 눈치 채고 변호사에게 컨설팅을 의뢰하는 등 대비책을 마련해야 진짜 분쟁이 생겼을 때 대응력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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