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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헌 법무법인 천고 대표변호사. |
[스타에이지] T금속은 한국에서 기술력이 뛰어난 기업으로 업계에서 정평이 난 회사다. 몇몇 분야에서 국내 최초로 국산화 시키는데 성공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 기업이 생산하는 제품 대부분에 대해서 미국, 일본, 유럽, 호주 등지에서 공업규격 인정을 받았다. 기술력이 뒷받침 되니 수출도 급격히 늘어났고, 정부와 지자체에서 수여하는 각종 시상식에서도 매년 수상할 만큼 한국과 해외에서 꽤 좋은 이미지를 구축해 놓았다.
T금속은 어느 날 미국의 한 기업으로부터 소방 관련 용품을 제작 납품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꽤나 정밀도를 요하는 제품이었다. 이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 거푸집 만드는 것도 까다로운 일이었다. 거푸집을 만드는 비용도 상당했다. 소방 관련 용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다른 제품 생산도 지장을 줄 만큼 공정도 복잡했다. T금속을 더 망설이게 만든 것은 미국기업 측에서 거푸집 제작비용을 반반씩 부담하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T금속 입장에서는 거푸집 제작비용까지 부담하면서 거래를 진행하기 어렵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미국 기업과 거래를 진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여러 난제에도 불구하고 도전하기로 결정한 것은 이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올라설 수도 있겠다는 계산 때문이었다. 이 기업은 미국에서도 나름 인지도 있는 기업이었고, 함께 일하면서 많은 기술 축적이 가능하겠다는 판단도 들었다. T금속은 수락하는 대신 미국 기업 측에 적정량을 꾸준히 발주해 줄 것을 요구했다. 발주량은 제품 단가에 큰 영향을 미치므로 T금속으로써는 당연한 요구였다. 미국 기업도 T금속의 제안을 수락했고 제품 생산은 시작됐다.
그러나 해가 지나고 또 다른 해가 지나도 발주량은 늘어나지 않았다. T금속 자체 판단으로는 적정량의 40% 정도밖에 주문을 받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T금속은 많은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기술축적과 인지도를 높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업 경영 측면에서 고려할 때 적자가 지속되는 것은 곤란했다. 그러던 차에 또 다른 기업과 접촉이 시작됐다. 이 기업은 T금속에 처음 발주를 한 미국기업과는 경쟁 관계에 있었다. 미국 시장에서 유통되는 T금속의 제품을 눈 여겨 보고 있다가 같은 제품을 자신들에게도 납품해 달라고 요청을 해 온 것이었다.
이보다 반가운 일이 없었다. T금속 입장에서는 소방용품 제작이 계륵과 같았다. 제품 생산을 중단하자니 지금까지 본 손실이 눈에 아른거렸다. 그렇다고 계속 생산을 하자니 원청 업체가 발주량을 늘려 주지 않을 것 같고, 그러면 적자는 오히려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문제로 고민하던 차에 똑같은 제품을 경쟁업체에 납품할 수 있다면, 지금까지의 적자를 한 번에 날려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 사실을 T금속에 처음 발주를 했던 미국 기업에서도 알게 됐다. 그리고 T금속이 다른 회사에 동일하거나 유사한 제품을 공급하는 것이 자기의 독점권을 침해한 것이라고 하며, 소송을 제기하겠다는 입장을 전해왔다. 미국 기업은 해당 제품에 관하여 자기에게 독점권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T금속은 경쟁사에 공급할 제품은 자사의 독자 기술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업체에 납품을 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거푸집 제작비용을 절반씩 부담했기에 T금속이 거푸집을 사용할 권리가 있다는 생각도 했다.
◆ 절반씩 투자했는데 왜 내게는 권한이 없지?
T금속처럼 갑작스럽게 소송 위협을 당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사실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T금속의 주장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거푸집에 대해 50대50으로 공동 투자를 했으니, T금속도 거푸집을 사용할 권한이 있다는 것이다. 반면 T금속에 제품을 발주한 미국기업 측 입장은 설계도면을 자사가 제공했으므로, 거푸집은 ‘영업기밀’에 해당된다고 주장했다.
어느 쪽 주장이 맞을까? 일단 법률적 측면에서 살펴본 결과 T금속이 거푸집을 임의로 사용하는 것은 힘들 것 같다는 판단이 섰다.
첫 번째 이유는 거푸집 제작비용을 미국 기업이 절반을 제공했다는 점이다. T금속의 주장대로 거푸집에 대한 소유권이 절반씩 있다고 했을 때, 미국 기업에게도 절반의 소유권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거푸집을 T금속이 임의로 사용할 수는 없다. 거푸집이 공동 소유물이므로, 거푸집을 용도(미국 기업이 주문한 제품을 생산하는 것) 외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미국 기업의 동의가 필요한 사안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조금 부연 설명을 하자면 회사 법인이 공동대표 체제로 꾸려질 경우, 기업이 작성하는 각종 공문서와 계약서에는 두 개의 서명이 있어야 한다. 공동대표 2명 모두 서명을 해야 결제 서류와 계약서 등이 법적 효력을 지닐 수 있다.
거푸집에 대한 권리도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미국기업과 T금속이 반반씩 소유권을 갖고 있으므로, 거푸집을 매각 처리하거나 또는 기타 용도로 사용할 경우, 미국기업과 T금속 양측의 ‘서명’이 필요한 것이다.
◆ 왜 국제소송이라는 말만 나오면 작아지는가?
이 부분에 대해 내가 설명을 했을 때 T금속은 처음에 납득을 잘 하지 못했다. T금속은 거푸집의 중요성에 대해 간과를 했던 것이다. 제품 생산을 하는 것은 생산 공정을 관리하고, 생산 과정에 투입되는 노하우가 중요한 것이지, 거푸집이 누구 것이냐 하는 것은 별로 중요치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국 기업과 거래를 시작할 때도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만한 기술력을 갖춘 기업을 찾기도 쉽지 않을 테니 아쉬운 쪽은 미국 기업이라 생각했다. 미국기업이 주문을 하면 제품을 제때 만들어 납품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거푸집은 제품을 생산하는데 투입되는 조그만 요소일 뿐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미국기업 이외에 누구든 제품 생산을 주문하면, 거푸집을 이용해서 상품을 만들 수 있을 거라 판단했던 것이다.
두 번째 중요한 포인트는 거푸집을 만드는데 필요한 설계도를 미국기업이 제공했다는 점이다. 설계도에는 각종 노하우가 담겨 있다. 미국기업이 설계도를 제공했다는 것은 자신들의 노하우를 전해줬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설계도는 영업기밀로 인정받을 가능성이 매우 커진다.
T금속은 설계도에 특허권이 부여된 것도 아니고 상표 등록이 된 것도 아닌 공개된 정보로 판단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런 판단은 영업기밀을 보호하는 국제적인 흐름을 잘 파악하지 못한데 따른 판단착오인 것이다.
이런 부분을 잘 몰랐던 T금속은 처음 거래를 시작할 때 계약서를 작성하지도 않았고, 이런 부분들을 명확히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필요하면 거푸집이야 언제든지 만들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국기업에게만 독점적으로 제품을 공급한다는 생각을 해 본 적도 없었던 것이다.
복잡한 국제거래 관행을 잘 몰랐던 T금속은 충분한 물량을 주문하지 않는 미국기업을 ‘나쁜 기업’으로만 생각하고 있었고, 자신들은 선의의 피해자라는 생각에만 몰입돼 있었다. 그런데 나의 설명을 들으면서 T금속 측은 매우 당황해하기 시작했다. 법적 분쟁이 생기면 100% 이긴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가, 소송이 복잡해 질 수 있겠다는 판단이 서자, 매우 소극적으로 변했다.
미국 기업들은 소송을 100% 잘못을 따지기 위해 제기하는 것이 아니다. 소송 또한 협상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T금속이 협상에 있어 우위를 점하기 위한 수단으로 적극적인 소송 전략을 마련할 필요성이 있지 않았나 싶다. 우선 미국기업이 충분한 물량을 주문하지 않은 것으로 인해 T금속이 입은 손실에 대해 적극적으로 어필하면 법정에서 동정적인 여론을 이끌어 낼 수 있다. 그리고 거푸집에 대해 T금속이 주장하는 ‘권한’이 법정에서 인정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협상의 카드로는 충분히 사용할 만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T금속이 거푸집 제작 비용을 무려 절반이나 제공했으니까!!)
이런 점들을 잘만 활용하면 T금속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재계약을 맺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엄밀하게 따지면 재계약은 아니다. 애초에 계약을 맺은 일이 없으므로.) 미국기업으로부터 충분한 물량의 주문을 받아 내거나, 또는 다른 기업에 대해 소량이나마 물량을 공급할 수 있는 조항을 계약서에 명기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T금속은 막판에 미국 기업과 맞서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다른 업체에게는 기존 업체와의 관계 때문에 더 이상 공급협의를 할 수 없다고 통지를 하고 말았다. 많은 부분에 있어 부담감을 느낀 것이다. 거푸집에 대한 소유권이 누구에게 있느냐 여부에 대한 논쟁을 협상을 위한 전략적 카드로 이해할 수도 있을 텐데. T금속은 ‘맞다’ ‘틀리다’는 것으로만 인식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내게 조언을 듣기 전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가, 그게 아니라는 말을 듣는 순간 입장이 180도 바뀌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소송비용 또한 부담이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미국기업과 소송을 하기 위해 ‘미국 로펌’을 별도로 선정하는 비용 이외에도 많은 자료를 만드는데 비용이 발생한다. 미국기업이 충분한 물량을 발주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자료를 준비해야 하는데 계약서가 없으니 쉽지 않다. 또한 충분한 물량을 발주하지 않아서 손해를 입었다는 부분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각 공정별로 제조원가를 산정해야 하는데 이것이 쉬운 작업이 아니다.
T금속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지만 아쉬움이 가시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다.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면 T금속에게 더 많은 혜택이 돌아올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여운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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