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헌변호사의 한류와 국제법]4.계약서도 뒤집는 ‘디스커버리’의 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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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헌 법무법인 천고 대표변호사

[스타에이지] 미국 소송에는 디스커버리(discovery)라는 제도가 있다. 한국어로는 증거개시절차라고 번역되는데 이 말로는 의미가 명확히 전달되지 않는다. 디스커버리는 한국에는 없는 제도인지라 한자어로 번역을 해도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힘들다. 디스커버리라는 말을 좀 더 쉬운 말로 옮겨보자면 ‘증거수집’ 혹은 ‘증거수집단계’라고 할 수 있다. 

그래도 정확한 의미가 이해되지 않아 고개를 갸웃 거리는 독자들이 꽤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 미국에서 벌어졌다고 가정해보고 디스커버리 제도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살펴보자.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이 제조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다. 소송 절차가 진행되면 피해자들은 제조사를 상대로 각종 내부 문건을 제출할 것을 요구하고, 제조사의 내부 문서를 제출받아 살펴볼 수 있다. 

피해자들은 가습기 살균제가 독성이 없다고 보고서를 조작한 교수와 제조사 직원이 자료조작 과정에서 주고받은 이메일과 문자 메시지 또는 메신저 내용을 모두 살펴볼 수 있다. 
제조사가 자신에게 불리한 자료를 공개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반문하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답은 똑같다. 가능하다. 

디스커버리 제도는 문서제출요청(request for production of documents) 권한을 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제조사가 내부 기밀이란 이유로 소송 상대편이 요청하는 문건을 제출하지 않을 경우, 문서 제출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소송에서 패배할 수 있다. 

똑같은 장면을 한국으로 옮겨보자. 피해자들이 독성이 없다는 연구용역 결과를 발표한 교수와 제조사 직원이 주고받은 이메일을 공개하라고 요청한다. 하지만 제조사는 내부기밀이라는 이유로 자료 공개를 거부한다. 피해자들은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어 발만 동동거린다. 법원 또한 증거가 없어 가습기 살균제로 인해 피해가 발생했는지 알 수 없다는 판결만 내린다. 

디스커버리 제도의 의미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소송 당사자들의 힘의 균형을 맞춰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보에 대한 접근권한을 동일하게 부여함으로써 실체적 진실에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디스커버리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는데 데포지션(depostion)이다. 우리말로는 증언녹취라고 번역된다. 증언녹취라는 말 또한 한국인들에게 의미가 정확히 전달되지 않는다. 

쉽게 설명하자면 소송 상대편을 인터뷰 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장면을 가습기 살균제 피해현장으로 다시 돌려보자. 가습기 살균제의 유독성 여부가 밝혀지는데 큰 걸림돌이 된 연구보고서가 하나 있다. 모 교수가 실험결과를 조작해 가습기 살균제는 유독성이 없다는 연구결과를 제출했고, 제조사는 이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자신들에게는 과실이 없다는 주장을 폈다. 
그런데 한국에 데포지션 제도가 도입되었다고 가정해보자. 피해자들은 가습기 살균제 무해성 연구를 지휘 감독한 교수 뿐만 아니라 연구에 참여한 십 수 명의 연구원들을 직접 만나 인터뷰 할 수 있다. 인터뷰 과정은 모두 동영상으로 녹화되고, 이들의 진술은 모두 녹취록으로 작성된다. 

피해자와 피해자들을 위해 일하는 변호사는 동영상과 녹취록을 몇 번이고 다시 살펴본 뒤 교수와 연구원들 진술 사이에 모순점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연구 결과가 조작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고, 피해자들은 연구 과정을 지휘한 교수와 제조사가 주고받은 문서와 이메일, 그리고 메신저 내용도 제출(request for production of documents)해 줄 것을 요청했다. 

또 교수와 연구원들이 실험 과정에서 주고받은 각종 이메일도 제출할 것을 요구했다. 자료들을 면밀히 분석한 결과 실험결과가 조작됐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제조사는 피해자들이 시험과 관련된 당사자들의 이메일을 제공할 것을 요구할 때부터 소송에서 패소할 것이라는 것을 직관적으로 깨달았다. 그래서 제조사는 지금까지의 고압적인 태도를 180도 바꿔서 피해자들과 합의를 하기 위해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여기까지 읽어 내려 온 독자들은 ‘소설’같은 이야기라고 웃어넘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T금속과 E컨설팅의 소송 과정에서 정말 소설 같은 일이 벌어졌다. 

미국 대법원 청사.

계약서 내용만 놓고 보면 T금속은 소송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E컨설팅의 거래처에 판매한 금액의 10%를 커미션으로 지급해야 하고, T금속은 E컨설팅의 거래처와는 직접 업무 처리를 하면 안된다는 내용이 계약서에 명시됐다. 

E컨설팅을 대리하는 변호사가 소송이 진행되면 자신들이 100% 이길 것이라고 호언장담하는 데에는 나름 근거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디스커버리와 데포지션이 진행되면서 분위기가 점점 달라졌다. 

첫 번째 반전 포인트는 E컨설팅이 매우 불성실하게 일을 했을 뿐만 아니라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정황 증거가 나타난 것이다. T금속은 E컨설팅의 소개로 소방관련 용품을 미국에 수출할 때 최소 물량을 보장해 줄 것을 계속 요구했다. 하지만 T금속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적정 물량이 확보되지 않음으로 인해 T금속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이에 대해 E컨설팅 측의 변호사는 소방 관련 용품 수출 계약서에 최소물량 보장 사안이 없으며, T금속과 E컨설팅의 미팅 회의록에도 최소물량 보장에 대한 언급이 없다고 지적했다. 재판이 진행될 경우 T금속의 주장이 거짓말로 몰릴 가능성이 매우 높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디스커버리를 통해 확보한 E컨설팅의 이메일과 내부 문서를 분석한 결과는 지금까지 파악한 것과는 전혀 달랐다. T금속에서 요구한 최소물량 보장 요구에 대해 E컨설팅은 인지하고 있었음이 드러난 것이다. 또 소방관련 용품을 수입하려는 미국 업체에는 최소 물량을 보장할 필요가 없다고 언급한 부분까지 서류로 드러났다. E컨설팅의 이런 행위는 T금속의 손해에 대해서는 수수방관했다는 점에서 미국 재판에서 승소할 가능성을 높여주는 결정적 증거가 됐다. 

미국인들은 신의성실의 원칙을 매우 중요시 여긴다. 이런 정황들은 배심원들에게 E컨설팅이 신의성실의 원칙을 어긴 것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디스커버리를 통해 E컨설팅이 불성실하게 일을 한 정황이 드러나자 E컨설팅 측 변호사는 매우 당황해 하기 시작했다. 계약서만 놓고 보면 자신이 100% 승소할 것이 자명했는데, 디스커버리와 데포지션을 통해 자신에게 불리한 증거와 정황이 속속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두 번째는 W기업과 거래 과정이었다. T금속은 W기업과 이미 거래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런데 E컨설팅은 W기업과 거래를 중개해주겠다며 W기업의 담당자와 함께 T금속을 방문한 것이다. E컨설팅은 이를 빌미로 커미션을 요구했다. T금속 측에서는 어이가 없는 상황이었다. 

W기업 대표와 담당 직원들에게 데포지션을 요청했다. 인터뷰가 시작되자 E컨설팅의 요구가 터무니 없는 것이라는 증언이 쏟아졌다. W기업과 T금속 간 거래에 있어 E컨설팅이 기여한 바는 아무것도 없으며, 이런 태도는 매우 부도적한 행위라는 발언들이 나왔다. 덧붙여 E컨설팅이 매우 부도덕한 기업이라는 사실을 이번 기회에 알게 됐으며 향후 E컨설팅과는 거래를 하지 않겠다는 입장도 밝혔다. 

W기업 관계자들의 증언이 나오지 E컨설팅 측의 변호사도 사실상 백기투항을 했다. 소송을 더 이상 진행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판단이 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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