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관리한 것이 사실상 확인됐다. 박영수 특검도 관련 수사에 착수했다.
블랙리스트가 사실로 밝혀지면 이 또한 최순실 국정농단 못지 않는 헌정질서 파괴행위로 기록될 것이다.
국회도 박근혜 대통령을 추가적으로 탄핵소추해야 할 만큼 중대한 사안이다.
박근혜 정부 초대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이 블랙리스트를 자기 눈으로 직접 봤고 그것을 아는 문체부 직원들도 다수 있다고 했으니, 블랙리스트의 실체를 특검이 밝혀내는 것은 시간문제인 듯하다.
유진룡 전 문체부방관이 27일 라디오방송에서 한 블랙리스트 관련 발언은 '지어낸 이야기'라고 하기에는 너무 구체적이다.
극보수층에서는 벌써 유진룡 전 장관이 김기춘 전 청와대비서실장 등과 막판에 갈등을 빚고 장관직에서 밀려난 데 대한 앙갚음으로 블랙리스트설을 날조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청와대와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의 존재를 줄곧 부정해왔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보다는 유진룡 전 장관의 발언이 훨씬 합리적이고 구체적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국정조사 청문회에서 엿볼 수 있었듯이 박근혜 대통령과 지근거리에서 호가호위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거짓말에는 이골이 난 인물들처럼 보인다. 블랙리스트와 관련해서도 더이상 그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못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유진룡 전 장관의 발언과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가 사실이라면 이 건이야 말로 박근혜 정부가 저지른 가장 극악무도한 헌정질서 파괴범죄라고 할 수 있다.
권력유지를 위해 문화예술인들마저 '친박' 반박'으로 자의적으로 분류한 뒤 차별 대우나 탄압을 했다면 이는 자유민주주의라는 대한민국의 기본질서를 뿌리채 뒤흔든 처사다.
유진룡 전 장관의 이날 CBS 인터뷰 발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가 문건 또는 서류 형태로 청와대에서 문체부로 내려온 건 2014년 6월이다.
당시 김소영 청와대 문화체육 비서관이 A4 용지에 빼곡히 수백명의 문화예술인 이름을 적어 조현재 문체부 1차관에게 전달하면서 "가서 유진룡 장관에게 전달하고 그걸 문체부에서 적용하라"고 지시했다.
김소영 전 비서관은 조현재 전 차관이 블랙리스트 작성 출처를 묻자 "정무수석실에서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고 했다.
당시 정무수석은 조윤선 현 문체부 장관이었다. 직전 전임자는 이정현 전 새누리당 대표였다. 조윤선씨가 정무수석에 내정된 것은 6월12이고, 임명장을 받은 시점은 6월23일이다.
결국 블랙리스트가 정무수석실에서 생산된 것이 맞다면 이정현, 조윤선 전현직 정무수석 모두 관련돼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 전에도 '구두 블랙리스트'는 있었다. 김기춘씨가 대통령 비서실장에 취임한 2013년 8월 이후에 구두로, 수시로 김기춘 비서실장의 지시라고 하면서 모철민 당시 교육문화수석이나 김소영 문화체육비서관을 통해 문체부로 전달됐다.
개중에는 영화 '변호인'과 관련해 이를 제작한 CJ를 제재하라는 것도 있었다.
그 외에 순수 문화예술 쪽에서도 반정부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나 단체에 대해서는 왜 지원을 하느냐? 왜 제재를 하지 않느냐라는 요구를 김기춘 실장이 직접 또는 모철민 수석 등을 통해 해왔다.
문제의 블랙리스트는 처음에는 수백명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는데, 청와대 정무수석실에서 오랜 기간 걸쳐 보강, 확대됐다.
블랙리스트 작성자는 정무수석실 산하 국민소통비서관실이며 당시 국민소통비서관은 최근 사표를 제출한 정관주 문체부 1차관이었다.
블랙리스트가 문건 형태로 내려온 뒤 당시 블랙리스트 거부 의사를 밝힌 문체부 1급들이 속칭 '솎아내기'를 당했다.
김종 전 차관이 (1급 솎아내기) 명단을 김기춘 실장한테 넘겼고, 김기춘 실장이 새로 온 김희범 차관한테 이 숙청명단을 전달했다.
김기춘 비서실장의 구두 지시를 무시한 유진룡 전 장관 본인도 그때부터 청와대와의 관계가 나빠졌고, 청와대에서 블랙리스트 문건이 내려온 직후인 214년 7월 전격 경질됐다.』
결국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고 6개월 정도 지난 시점부터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작성은 시작됐고, 세월호 참사 이후에는 블랙리스트 규모는 물론 문체부에 대한 이행 압박도 드세졌다는 것이 유진룡 전 장관의 말이다.
문화예술는 그 속성상 사회와 권력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볼 수 밖에 없다. 물론 정권을 찬미하는 문화예술도 있을 수 있겠지만, 정권이 비판을 막고 찬양만 강요한다면 문화예술계는 물론 사회 전체가 기형화될 수 밖에 없다.
나찌나 북한같은 파시스트 사회와 다를 게 없는 것이다. 헌법이 제22조에서 "모든 국민은 예술의 자유를 가진다"고 못박은 것도 국가권력이 문화예술에 부당하게 간섭해서는 안된다는 의미다.
박영수 특검이 26일 조윤선 문체부 장관의 집무실과 자택에 대한 압수수색을 단행하면서 영장에 제시한 죄목은 형법상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죄다.
이는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사람의 권리행사를 방해한 때 적용되는 죄로 법정형은 5년 이하의 징역이나 10년 이하의 자격정지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이다.
하지만 블랙리스트 건은 단순히 직권남용죄로 다루고 말 일이 아니다.
유진룡 전 장관의 말대로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문화예술계를 차별대우 한 것은 명백한 헌법위반이다.
표현의 자유, 예술의 자유, 양심의 자유, 사상의 자유, 평등권 등을 침해한 것은 물론이고, 국가의 문화예술진흥 의무까지 위반한 헌정질서 파괴행위다.
유진룡 전 장관은 블랙리스트 작성 배후로 김기춘 전 비서실장까지 언급했지만,박근혜 대통령의 지시나 허락없이 이런 일이 청와대에서 벌어진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 블랙리스트 건만으로 탄핵소추감이다.
다행인 것은 유진룡 전 장관을 비롯해 문체부 관료들 가운데 상당수가 청와대의 블랙리스트을 거부했다는 점이다.
조윤선 장관은 지난달 11일 국회 대정부질문 답변에서 "블랙리스트에 포함된 인사나 단체 중에도 정부지원을 받은 데들이 여럿 있다"면서 이를 블랙리스트의 존재를 부정하는 근거로 인용했다.
유진룡 전 장관에 따르면 이런 사례가 창작과 비평, 연출가 이윤택 선생 등인데, 이는 되레 문체부 직원들이 블랙리스트를 거부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한다. 즉 문체부 일부 직원들이 창비나 이윤택 마저 지원대상에서 빼면 문제가 될 것이라고 주장해 겨우 지원이 성사됐다는 것이다.
그나마 대한민국 관료사회가 살아있다는 걸 재발견한 것에 만족해야 할 지경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연상시키는 영화를 만들었다는 이유만으로 CJ라는 특정기업에 제재를 가하라고 김기춘 전 실장이 문체부에 지시했다고 유진룡 전 장관이 폭로한 대목에서는 어이가 없어 기가 막힐 지경이다.
이 부분만 규명되면 '법꾸라지' 소리를 듣는 김기춘 전 비서실장도 직권남용에 따른 형사책임을 피해갈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문체부 직원들이 '선배관료'인 유진룡 전 장관의 희망대로 특검수사에 협조한다면 박근혜 대통령을 둘러싸고 있는 마지막 철의 장막이 걷힐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사진=유진룡, 김기춘, 조윤선 [출처 유진룡 페이스북, 포커스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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