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무게가 너무 크면 장남은 기가 죽는다는 속설이 있다. 서민배우로 명성을 떨쳤던 허장강과 그의 장남 허기호도 속설대로 된 것일까?
EBS1TV ‘리얼극장-행복’에서는 31일 ‘전설의 배우 허장강의 장남 허기호가 짊어진 아버지의 이름값’ 편이 전파를 탔다.
‘천의 얼굴’이라는 수식어를 지닌 명배우 허장강. 그는 50년대부터 70년대까지 수백 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한국영화사에 손꼽히는 대표 조연배우로 회자되는 전설적인 배우다.
허장강이 53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난 뒤, 그의 장남 허기호가 1978년 영화를 통해 데뷔했을 때 대중의 기대는 매우 컸다. 아버지를 쏙 빼닮은 외모와 연기력으로 주목받으며 시작한 배우생활이었지만 대중의 관심은 거기까지였다.
잘 다니던 대기업도 그만두고 시작한 배우생활은 뜻대로 되지 않았고 무명배우에 머무르기만 했다. 게다가 훨씬 늦게 데뷔한 이복동생 허준호의 성공가도는 장남인 허기호를 자괴감과 열등감에 빠지게 했다. 그렇게 ‘허장강의 장남’이라는 후광과는 다르게 허기호의 현실은 초라했다.
대중에게 인정받는 배우일 수 없었던 허기호는 하나뿐인 아들에게조차 존경받는 아버지가 되지 못했다. 무명배우인 탓에 아내와 아들에게 경제적 어려움만 안겨줬기 때문이다.
거기에 안정적으로 살기 바랐던 모범생 아들 진우는 입대 후, 돌연 배우가 되겠다며 전공을 바꿔 대학을 재입학하기까지 했다.
마지못해 허락했지만, 배우지망생으로서 아들의 태도는 영 못마땅하다. 선배의 입장에서 아들에게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지만 진우는 새겨듣지도, 달라지지도 않는다. 한집에 있어도 대화는커녕 자신을 투명인간 취급하는 아들.
허기호는 집에서 소외감을 느끼며 애완견만 돌보며 지내고 있다. 경제적으로 아들을 뒷받침해주지 못한 현실에 내심 미안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아버지인 자신을 소외시키는 아들이 괘씸하기도 하다.
무시당하는 것 같아 자존심이 잔뜩 상한 아버지 허기호. 여전히 집안에서의 부자는 냉랭한 기운이 흐를 뿐이다.
아들 허진우(31)는 어릴 때부터 자연스레 영화를 접할 기회가 많았다. 핏줄은 속일 수 없는지 그 역시도 배우의 꿈을 키우게 되었다. 하지만 할아버지와 아버지, 삼촌의 이름은 오히려 부담스럽기만 했다.
그래서 꾹꾹 눌러 담았던 배우의 꿈. 진로를 쉽사리 정하지 못하던 아들은 자신이 좋은 배우가 되면 엄마에게 큰 기쁨을 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어 어렵사리 전공을 바꾸게 된다.
결국, 아들의 꿈의 시작은 가족의 행복이었다. 언제나 가족이 1순위였던 아들. 하지만 아버지 허기호는 그렇지 않았다. 아버지는 밖에서 보이는 ‘허장강의 장남’이라는 체면에만 집착할 뿐, 어머니와 자신에게는 한 번도 따뜻한 아버지인 적이 없었다.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이었던 허기호의 모습에 아들은 점차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게 되었다.
아들의 마음을 더욱 얼어붙게 한 건 무능한 아버지로 인해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없는 지금의 현실. 가족을 위해 당장 생계를 책임지게 된 허진우는 헬스트레이너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아가고 있다.
한 때, 한류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의 단역 출연만으로 제작진에게 눈도장을 찍을 만큼 재능 있던 그였지만, 아버지 허기호 대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느라 배우의 꿈을 마음껏 펼칠 수가 없다.
자신마저 아버지처럼 가족을 외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 속내도 모른 채, 아버지 허기호는 조언이라며 이런저런 말을 해주지만 그것이 와 닿을 리 없는 아들. 허진우의 기억 속에 아버지의 울타리는 정서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언제나 비어있었다.
대화만 시작하면 고성으로 끝나버리는 허기호 부자. 아버지 허기호는 어릴 때 살가웠던 아들이 그립다. 도통 자신 앞에만 있으면 냉랭하게 마음을 닫아버리는 아들이 답답해 처음으로 화해의 손길을 내밀어 본다.
그렇게 떠나게 된 6박 7일간의 중국 서안으로의 여정. 처음으로 둘 만의 시간을 가지며 대화를 시도해보지만 그들의 관계는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가치관과 생각이 너무도 달라 서로에게 등 돌렸던 아버지와 아들. 일주일간의 여정으로 허기호-허진우 부자는 서로를 바라볼 틈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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