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배우가 있다. 연극으로 관객과 소통하는 법을 알았고 수많은 영화의 단역과 조연을 거쳐 이제는 충무로의 둘째가라면 서러운 신 스틸러(Scene Stealer)가 됐다. 공중파 드라마를 통해 연기의 폭을 확장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얼마 전 개봉한 영화 <남자사용설명서>에서는 당당히 주연으로 이름을 올렸다. 치열한 세계에 뿌리 내린지 약 10여 년 만에 드디어 인정받는 배우의 반열에 오른 셈이다. 조금 남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지금까지 아주 낮고 잔잔하게, 그저 흐르기만 했다는 것이다. 인기를 얻기 위해 욕심을 부린 적이 없는 배우. 그는 확실히 냉엄한 배우의 세계가 요구하는 경쟁에서 한 발 떨어져 있는 사람이다. 그저 좋아하는 연기를 하며 살아왔을 뿐이란다. 오정세, 이 배우의 힘은 어디에 있을까. 취재 한미림 | 사진 최은희
최근 MBC 수목드라마 <보고싶다>에 출연했는데 작품 한 편을 끝낸 소감은
아직 실감이 안 난다. 마지막까지 굉장히 바쁘게 촬영했고 쉴 시간이 없었다.
드라마가 많은 관심을 끌었지만 시청률에선 좀 아쉬웠다
개인적으로 그런 아쉬움은 없다. 오히려 아쉬움보다 스스로 만족감이 더 크다. 정말 재미있게 촬영한 것 같다.
주정명이 귀엽고 매력적인 캐릭터라 높은 관심을 받았다
인기는 따로 기대하지 않았다. 다음에 더 잘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크게 상관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이 편하다.
인기가 많아진다는 건 배우로서 행운 아닌가
어렸을 때부터 가장 불편했던 장소가 내 생일파티였다. 사람들이 모두 나를 쳐다보며 축하해주는 자리가 굉장히 불편한 느낌으로 남아있다. 원래 나 자신을 능숙하게 드러내는 성격이 아니다. 배우로서 인정받고 싶지만 생활인으로 돌아갔을 때는 아무도 나를 몰라보는 것이 편하고 좋다.
배우가 직업인 사람인데 좀 의외다. 스스로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나
가장 친한 친구들도 나의 흐트러진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술 때문에 필름이 끊겼던 적이 평생 딱 한 번일 정도다. 다들 ‘네 속마음은 잘 모르겠다’고 얘기한다. 화도 잘 내지 않고 뭐든 금방 잊어버리는 성격이다. 어찌 보면 배우로는 양면적인 분위기를 가질 수 있는 것 같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내 안에 있는 모습.
<보고싶다>는 박유천과 윤은혜 주연의 작품이라 해외의 관심도 높다. 덩달아 해외 팬이 많이 생길 것 같은데
해외에서 인기가 많아지는 건 얼마든지 좋다. 내가 그 곳에 사는 것도 아니고 사생활이 불편해질 건 없으니까.(웃음)
영화 <남자사용설명서>(2월 14일 개봉)의 작업은 어땠나. 이원석 감독과는 잘 맞았나
이원석 감독과는 굉장히 편하고 좋았다. 시나리오를 가지고 많은 얘기를 나눴는데 개인적으로는 감독에게 따로 주문을 했다. 예전에는 (작품에 대해) 스스로 사전 검열을 했는데 이번에는 내가 궁금한 것, 바꾸고 싶은 것, 의문스러운 것이 있으면 사전 검열 없이 감독님에게 다 얘기하겠다고 했다. 그걸 열 개 중에 한두 개만이라도 바꿔준다면 나를 위해서도 영화를 위해서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제안한 거다. 스스로 검열하지 않고 필터 없이 바로 얘기할 테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 버거워하거나 서로 불쾌해하지 말자고 했다. 이런 기본 얘기가 된 상태에서 작업을 해 나갔다. 덕분에 촬영하면서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반영하기도 하고 불편한 것이 있으면 조율도 하면서 편하게 작업했다.
감독이 촬영장에 병원 환자복을 입고 온 적도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굉장히 독특한 스타일인 것 같다
개성이 강한 스타일이다. 무엇보다 가장 독특한 건 톱스타 역할인 남자 주인공에 다른 감독이라면 절대 생각하지 못했을 오정세라는 배우를 캐스팅했다는 것이다.
극 중 Dr.스왈스키로 나오는 박영규 씨가 이 영화가 개봉하고 나면 오정세는 아시아의 스타가 돼있을 거라고 하더라. 개인적인 생각은 어떤가
영화가 잘 되면.(웃음)
영화를 보고 난 후 어떤 느낌이 들었나
나는 개인적으로 내 영화에 대한 느낌을 잘 모르겠다. 객관적 평가가 불가능하다. 다른 영화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즐길 수 있는데 내 영화는 연기 위주의 분석을 하면서 스스로 아쉬웠던 점만 계속 생각하게 된다. 목소리 출연을 했던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은 목소리만 나와서 그런지 내가 출연한 작품 중 유일하게 즐기면서 본 작품이다. 극영화는 스스로 객관화되지 못하는 것 같다.
개인적인 욕심이 커서 그런가
그런 것 같다. 대부분의 배우가 자기 작품이나 연기를 객관적으로 보지 못할 거다.
톱스타 역할을 굉장히 능청스럽게 잘 할 것 같았는데 스스로 어색했다고 해서 놀랐다
처음엔 어려웠다. 외모가 멋지면 까칠하고 자기중심적인 캐릭터도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런데 어중간한 외모를 가지고 그렇게 움직이게 되면 관객의 공감도 얻지 못하고 자칫하다 캐릭터가 위험해질 수 있다. 시나리오 상에서는 어떤 행동을 해도 여자들의 눈에는 밉지 않고 사랑을 한 몸에 받는 톱스타 역할인데 내가 이러한 캐릭터를 받쳐줄 수 있는 외모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부분을 풀어가는 게 어려웠다.
‘국내에서도 이런 로맨틱 코미디를 만들 수 있는 시대가 왔다’는 반응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영화는 분명히 독특한 것 같다. 대부분 영화는 ‘a→b→c→d’ 순서의 느낌인데 이 영화는 ‘a→b→8→7→f’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하지만 마냥 엉뚱한 느낌은 아니다. 호불호가 갈릴 수는 있겠지만 좋은 느낌으로 봐주는 관객들이 더 많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최근에 코믹한 연기를 많이 보여주는 것 같은데 다른 연기에 대한 허기는 없나
나 역시 한 색깔로 굳어지는 것은 싫다. 고민이 필요하다. 지금은 가벼운 역할 위주로 작품을 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조절을 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억지로 바꾸려고 하진 않는다.
개인적으로 연상호 감독의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2011)에 나왔던 경민과 같은 캐릭터를 실제 오정세의 연기로 보고 싶은 마음도 있다
그 전에도 어둡고 무거운 역할은 했지만 대부분 독립영화이다 보니 관객들과 만나는 노출 빈도수가 적었다. 상업 영화의 경우도 근래 들어 코미디 장르에 많이 출연했을 뿐이지 <시크릿>(2009)이나 <베스트셀러>(2010)처럼 꾸준히 무게감 있는 역할을 해왔고 현재도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내가 원한다고 해도 (감독이나 제작사 쪽에서) 작품의 캐릭터와 배우 이미지가 맞지 않다고 판단하면 캐스팅이 될 수 없으니까.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급하게 뭔가를 이루려고 하거나 ‘다음 작품은 이런 게 아니면 안 돼’라는 식의 고집을 부리기보다는 2년이 됐든 3년이 됐든 자연스럽게 흘러가다가 새로운 기회가 오면 내가 가진 것을 보여주는 게 맞는 것 같다. 내 안에는 경민처럼 또 다른 모습이 항상 존재하고 있다. 코미디 연기를 위주로 한다고 해서 그런 모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예정된 다음 작품이나 앞으로의 계획은
이재용 감독의 <뒷담화: 감독이 미쳤어요>가 곧 개봉(2월 28일)한다. 연상호 감독의 장편 애니메이션 <사이비>에 두 번째로 목소리 출연을 했는데 <돼지의 왕>에 이어 이번 작품도 칸 영화제에 출품될 것 같다. 작업 마무리 단계다. 예능프로도 한다. SBS 파일럿 프로그램 <행진>에서 이선균, 유해진 선배와 함께 국토대장정을 하게 됐다. 꾸미기보다 있는 그대로의 진실한 모습을 보여준다는 데 의미가 있는 프로그램이다. 개인적으로 기회가 된다면 다큐멘터리의 내레이션에 도전해보고 싶다.
어떤 배우로 남고 싶나
죽을 때까지 연기하는 배우. 평생 연기하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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