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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부터 12월4일까지 대학로 알과핵 소극장 무대에 오르는 나헤석의 소설 '경희, 원한, 현숙'의 세 주인공. |
[스타에이지] "내가 시집가서 남편밥이나 얻어먹고 살려고 일본까지 가서 그 어려운 공부를 배워왔나. 끝도 보지 못한 내 예술공부는 어떻게 하라구. 어찌해야 좋을까. 지금 당장 집을 나간다면 또 어디로 가야하는 건지...지금 내 앞에는 두 개의 길이 있다. 하나의 길은 쌀이 곳간에 쌓이고 귀염도 받고 사랑도 받고 밟기도 쉬운 황톳길, 탄탄대로의 길. 그러나 다른 하나의 길은 팔이 아프도록 보리방아를 찧어야 겨우 얻어먹게 되고 천대 뿐인, 사랑의 맛은 꿈에도 맛보지 못 할 험난한 고된길. 이 두 개의 길 중에 어느 길을 선택해야 하나?..." (경희)
"그 힘든 일 조금만 잘못하면 큰 마누라가, “이년 그러려거든 나가거라” 하며 손을 들어 때리려고 할 때에는 곧장 내 눈에서 뜨건 불똥이 튈 것처럼 분하고 또 분했어라...그 집 살이 딱 일 년 만에 그 집 대문을 나섰소...이 몸이 나이 서른도 되기 전에 아무 곳 갈 데 없는 몸인 것을 알았소. 걸인, 여자 몸인 걸인, 세상에서 젤로 가련하고 추한 모습 아니것소. 그래 마침내 지는 장에서 오십원을 꾸어 그것을 밑천 삼아 장사를 시작했지라...오늘도 왕복 육십리 장을 걸어와서 식은 밥 한술 떠먹고 이러고 앉았어라. 이러다 곧장 이 불기 없는 냉골에 쓰러져 잠이 들것이지라. 내일 새벽두 일찍 일어나 나가봐야 내일 하루 입에 풀칠이라도 하지 않겄소..."(원한)
"식민지 조선의 어찌할 수 없는 빈곤. 이 화려한 명동거리를 조금만 벗어나면 조선의 수도 경성에 쓰러져가는 초가집이 거진 반이고 남자들도 대학 졸업하고 취직을 못해 거리를 방황하는 빈궁하기 짝이 없는 이 시대에, 우리 가난한 여자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요? 이 빈곤과 가난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혼자만의 힘으로 당당히 살아갈 수 있을까요? 사업을 해야 해요. 나만의 사업을..."(현숙)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문학가였던 근대 신여성의 효시 나혜석(1896.4.28~1948.12.10)의 글들 중 가장 문학적 기량과 선각자적 의식이 돋보이는 단편소설 ‘경희’, ‘원한’, ‘현숙’ 3개를 묶어 각색한 ‘경희·원한·현숙’이 30일부터 무대에 오른다.
'경희·원한·현숙'은 국내 유일의 여성 극작가전인 ‘한국여성극작가전’ 네 번째 무대의 마지막 작품으로 대학로 알과핵 소극장에서 30일부터 12월 4일까지 공연한다.
소설 '경희'는 일본 유학생 경희를 통해 당대 여성 지식인들의 고민과 현실을 드러낸다. '원한'은 이소저라는 여인을 통해 여성의 삶이 얼마나 모순적인지, 그것이 왜 해체되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현숙'은 나혜석의 작품중 가장 파격적인 작품으로 카페 여급이자 모델인 신여성 현숙이 경제적 주체로 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를 그렸다.
극작가 최명희씨(71)씨는 백은아 연출과 함께 세편의 나혜석 소설 '경희', '원한', '현숙'을 하나의 연극 ‘경희·원한·현숙’으로 각색했다. 나혜석의 삶을 다룬 희곡은 더러 있었지만 나혜석의 소설이 희곡으로 각색된 것은 처음이다. 소설 속 주인공인 경희, 이소저, 현숙은 한 무대에서 오버랩되며 각기 다르면서도 같은 여성의 삶을 보여준다.
2013년 한국여성극작가전 첫 번째 무대에 ‘새벽하늘의 고운 빛을 노래하라’를 통해 나혜석의 일대기를 소개한 최명희 작가는 올해는 나혜석의 소설에 주목했다.
"1930년대, 아련한 한국인의 과거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작품입니다. 윤심덕, 일엽스님, 김명순 등이 살았던 매력있는 1930년대의 시대상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경희, 이소저, 현숙 등 세 여인이 다 비참한데 나혜석과 가장 닮은 이는 경희입니다. 나혜석을 알고 작품 속에서 페미니즘을 보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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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희 작가. |
최명희 작가는 1969년 서강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 한국 사실주의 연극의 대가인 고 차범석(1924~2006) 선생의 추천으로 1980년 현대문학에 희곡 ‘미소짓는 꿈’으로 등단했다. 이후 약 20편의 희곡을 발표했다. 대표 희곡으로 ‘미소짓는 꿈’외에 ‘길몽’(1981년, 제3회 대한민국연극제), ‘안개의 성’(1983, 제5회 대한민국연극제), ‘오해의 벽’(1984, MBC라디오 극본 공모 입상작), ‘어떤 작은 일들’( 1994, 제3회 세계여성극작가대회), ‘반가워라 붉은 별이 거울에 비치네’(2003, 문예진흥원 창작활성화 지원 선정) 등이 있다.
그녀의 희곡엔 노처녀, 주부 등 여성이 주인공으로 종종 등장한다. 이번 제4회 한국여성연극제를 통해 낭독공연 ‘허난설헌’(연출 김국희)을 선보이기도 했던 최명희 작가는 본인이 페미니스트 같다는 생각은 들지만 페미니스트를 앞세우는 것은 원치 않는다고 했다. "허난설헌이나 나혜석의 삶은 비극적입니다. 거기에 대한 아픔이 나를 쓰게끔 끌고 갑니다."
한국여성극작가전은 한국여성연극협회(회장 류근혜)가 2013년부터 매년 가을 열고 있으며 올해로 4회째다. 올해 공연 작가로는 나혜석, 최명희 작가와 함께 이지훈(낭독공연 ‘조카스타’, 연출 이정하), 최은옥(‘진통제와 거울’, 연출 백순원), 김혜순(‘눈물짜는 가족’, 연출 송미숙) 작가가 선정됐다. 11~13일 낭독공연을 시작으로 11월 한달간 ‘진통제와 거울’, ‘눈물짜는 가족’, ‘경희·원한·현숙’이 차례로 무대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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