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에이지=김재범 기자] 꿈을 꾼 적이 있었다. 사막 한 가운데 서 있었다. 내리쬐는 뙤약볕이 사라진 이상한 사막이었다. 푸석한 모래 바람만 날리고 있었다. 서늘했다. 어두웠다. 고요했다. 두려웠다. 무서웠다. 사막의 강렬한 볕은 사실 그랬다. 생명체를 거부한 그 공간의 삭막함에 기운을 불어 넣어 주던 활력이었다. 존재하는 티끌조차 말려 버릴 기세의 빛은 사실 그랬다. 사막은 어느덧 외로운 공간이 됐다. 함께 얘기를 나누던 볕의 기운은 어느덧 그렇게 사라지고 말았다. 그곳에도 삶은 존재하고 생명의 움틈은 자리하고 있는 법이었다.
‘바그다드 카페: 디렉터스 컷’을 본 뒤 그 날 밤 꿈 속에서 겪은 꿈 같은 상황이었다. 사실 꿈인지 아니면 그 꿈 속의 또 다른 꿈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그것도 아니라면 그 황량함의 매혹 속에 나 자신도 모르게 빠져 들어간 매몰된 자아의 다른 얼굴이었는지 모를 일이다.
1987년 소개된 버전의 감독판인 이번 영화는 여전히 붉고 매마르고 갈라져 있고 먼지가 흩날리며 감정의 밑바닥이 쩍쩍 갈라진 논바닥처럼 드러나 있었다. 그럼에도 이 공간의 매혹은 그대로였다. 지루하고 지난한 시간의 연속에서도 삶은 계속됐다. 그렇게 지칠 때로 지친 먼지 같은 삶의 잠시 고요해진 바람의 심술을 눈치 보며 땅에 발을 내딛는다. 작고 고요한 그곳. 생기가 말라버린 그곳. 하지만 우리가 잃어버린 모든 것을 되찾아주는 마법의 힘이 발휘되는 그곳. ‘바그다드 카페’가 자리하고 있다. 그렇게 관객들은 스크린과 현실의 공간이 무너진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바그다드 카페’의 문을 열어 제낀다. 삐꺽 거리는 문소리와 함께 들어선 그 공간. 커피머신조차 없는 카페는 적막이 커피잔을 채우고 있었다. 슬픔과 낙담이 적막의 맛을 끌어 올려주는 각설탕처럼 소복히 쌓여 있었다.
그곳의 문을 여는 한 여자가 있다. 관객들은 이 뚱뚱하고 못생긴 여자의 어색한 영어 발음에 피식 입고리가 올라가고 있다. 그는 삐딱하게 자신을 쳐다보던 카메라의 시선만큼 뒤틀린 남편의 폭언에 그의 곁을 떠나 홀로 이 공간에 들어섰다. 낯선 그 공간 속에 더욱 낯선 이 여인의 모습은 어쩌면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일 것이다. 어디에서도 어느 곳에서도 낯섬을 안고 살아가야하는 현대인들의 모습은 30년 전 이 영화의 시작이나 지금 2016년의 현재나 별다를 바 없어 보인다. 이 뚱뚱한 여인의 이름은 ‘야스민’이다.
야스민이 들어선 낯선 공간 ‘바그다드 카페’에는 또 다른 여인이 있다.
그녀의 게으른 남편은 떠났다. 아들은 카페 한 구석 낡은 피아노에서 바하의 곡을 연주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사춘기 딸은 남자친구와 밖으로 돌아다닐 뿐이다. 카페 매니저인 인디언 청년은 세상사 포기한 모습이다. 이 여인의 손에는 이제 갓 태어난 아들 하나 뿐이다. 생명의 기운은 잃은 공간에서 유일한 울음은 그녀의 갓난 아들 뿐이다. 그녀의 이름은 ‘브렌다’.
그녀의 카페는 커피 머신조차 없는 이곳은 이름만 카페일 뿐이다. 손님도 없다. 모텔을 겸하는 ‘바그다드 카페’ 인근에 살고 있는 초로의 방랑자 루디 콕스, 부메랑 던지게 일인 떠돌이 여행객, 모텔에 장기 투숙 중인 한 여인이 손님의 전부다.
브렌다에게 삶은 고통이다. 삶은 지침이다. 삶은 재미없는 일상의 연속이다. 삶은 생기 없는 죽음의 다른 말이다. 그녀는 신경질적이고 거칠다. 주변의 작은 즐거움이 그녀에겐 불편하다.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그녀의 삶은 그저 고통스럽다.
그런 그녀에게 야스민이 찾아온 것이다. 뚱뚱하고 못생긴 그녀의 뒤뚱거리는 모습이 시선을 사로 잡는다. 땀으로 범벅이된 얼굴에선 감정을 읽을 수가 없다. 그녀는 그저 ‘바그다드 카페’와 그 카페의 모텔을 묵묵히 오간다. 그 오감의 반복 속에서 야스민은 주변을 바꿔 나간다.
야스민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서 주변과 대화를 나눠 나간다. 작은 것부터 그는 하나 둘씩 바꿔 나갔다. 정체된 그 공간은 고요했던 공간은 ‘흐름’이 생겼다. 야스민의 묵묵했던 반복된 ‘오고 가고’의 뒤뚱거리는 발걸음은 점차 생기를 불어 넣는다. 그의 반복된 일상에 ‘바그다드 카페’는 활력을 되찾는다. 점차 입소문이 퍼지면서 그 활력은 황량한 사막을 오고가는 ‘트러커’(트럭 운전사)들의 오아시스가 된다. 그런 야스민의 존재가 불편한 사람은 단 한 명이다. 브렌다였다.
어느 날 브렌다는 야스민이 자신의 아이를 안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자신에겐 없는 모든 것을 갖고 있는 야스민이 미웠다. 불안했다. 그녀를 자신의 공간에서 밀어내려 했다. ‘나가’란 말에 야스민은 뜻밖의 말을 내뱉는다. “난 아이가 없어요.”
결국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의지를 하게 된다. 야스민에게 브렌다는 모든 것을 가진 여인이었다. 가족을 갖고 있는 행복의 모습이 보였다. 브렌다에게 야스민은 주변을 돌아볼 여유의 다른 말이었다. 쉼표와 같았다. 두 사람은 어느 새 서로에게서 보지 못했던 잃어버린 가장 중요했던 그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것을 발견한 순간 관객들도 스스로에게서 잊고 지내던 절대 보지 못했던 그것을 바라보게 된다.
‘바그다드 카페’는 황량하고 척박하고 메마른 감정의 영화다. 하지만 반대로 이 영화는 그 무엇보다도 가득 차 있다. 무엇보다도 풍부하게 젖어 있다. 무엇보다도 여러 곳을 바라보고 있다.
인간관계 속 결핍의 지점이 가져오는 상처의 다른 말은 혹시 ‘자신’은 아닐까.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를 갖기 바란다면 ‘바그다드 카페’의 황량함이 반대로 당신의 가슴을 가득 채워주는 보물을 선사할 것이다.
영화 음악 사상 최고의 명곡으로 꼽히는 ‘Calling You’의 선율에 잠시 마음을 열어본다. 오는 14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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