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알고 싶다' 촛불혁명 이끈 6월 항쟁 30년...새겨본 도촛불, 그리고 민주주의

 '그것이 앞고 싶다' 1079회 '6월 항쟁 30주년-거리의 사람들'편

이예진 기자 승인 2019.02.25 20:20 | 최종 수정 2019.03.05 13:49 의견 0

10일 저녁 ‘그것이 알고 싶다’ 1079회에선 6·10 민주항쟁 30주년을 맞아 ‘6월 항쟁 30주년-거리의 사람들’편을 방송한다.

1987년 6월 10일, 전국 곳곳에서 일어났던 민주화 운동은 전두환 정부의 강압적인 통치를 무너뜨리고, 정치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민주화를 앞당기는 계기가 되었다.

이날 ‘그것이 앞고 싶다’에선 6·10 민주항쟁 30주년을 맞아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현 주소를 묻는다. 6·10 민주항쟁 촛불혁명으로 이어진 정신을 통해 이 땅을 사는 평범한 시민들이 이끈 변화를 돌아보고 앞으로 함께 나아갈 민주주의를 고민해 본다.

1980년대 중반 학생들과 야당 정치인들, 그리고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한층 높아졌다. 특히 국민이 대통령을 직접 뽑는 ‘대통령 직선제’는 가장 중요한 요구 사항이었다. 전두환 정부는 처음에는 직선제로 바꾸라는 여론을 무시했지만, 국민들의 요구가 거세지자 어쩔 수 없이 헌법 개정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당시 연세대학교 학생이었던 이한열 군이 시위를 벌이다 최루탄에 맞아 죽는 사건이 발생하자, 분노한 시민들에 의해 6월 민주 항쟁의 열기는 더욱 뜨거워졌다.

그런데 1987년 4월 13일에 갑자기 ‘호헌 선언’이 발표됐다. 호헌이란 헌법을 보호하거나 지킨다는 뜻으로 이전의 헌법대로 대통령을 간접 선거로 뽑겠다는 선언이었다. 전두환 정부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헌법을 개정할 시간이 부족하고, 정치인들이 서로 뜻을 모으지 못했다는 이유를 들어 직선제 요구를 거부했다. 그러고는 6월에 집권당인 민주정의당의 대통령 후보로 노태우를 뽑았다.

이에 분노한 시민들은 ‘호헌 철폐’와 ‘독재 타도’ 등을 외치며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에 들어갔다. 그해 초에 고문을 받다 숨진 박종철 사건과 시위 도중에 최루탄을 맞아 숨진 이한열 사건으로 인해 시민들의 분노는 더욱 커졌다.

1987년 6월 10일 전국 곳곳에서 거의 동시에 시작된 시위는 20일간 매일 계속됐다. 처음에는 학생들이 중심이 되었으나 차츰 일반 시민들의 수가 늘어나 국민 운동으로 발전해 갔다. 회사원들도 점심 시간이나 업무를 마친 뒤 넥타이를 맨 채 시위에 참여해 ‘넥타이 부대’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결국 전두환 정부는 6·10 민주항쟁에 굴복해 대통령 직접 선거와 국민의 기본권 보장, 구속되나 연금된 정치 인사들의 석방 등을 내용으로 하는 6·29 민주화 선언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헌법이 개정되었고, 국민들은 16년 만에 대통령을 자신의 손으로 뽑을 수 있게 됏다.

6·10 민주항쟁은 시민들의 민주주의 의식을 크게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노동자, 농민, 도시 빈민 등 사회 여러 계층에서 자신들의 권리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이어졌으며 시민운동도 활발해졌다.

‘그것이 알고 싶다’ 제작진은 30년 전 6월 항쟁 거리의 사람들을 만났다.

명동에서 45년 째 가게를 운영하는 탁필점 할머니는 지금도 명동의 거리를 보면 그 날이 선명히 떠오른다. 호헌철폐! 독재타도! 한 마음 한 뜻으로 구호를 외치던 날, 전경을 피해 최루탄을 피해 도망치는 학생들을 가게 안으로 숨겨주었다.

당시 한양대 간호학과 학생이었던 유진경 씨는 친구들과 의료진단에서 함께 활동했다. 다치는 사람이 생기면 치료를 하는 것이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내 일’ 이었다고 회상했다. 각자의 자리에서 함께 했던 30년 전 6월 거리 위의 사람들. 표현은 달랐지만 바람은 같았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바람.

민주화 과정에서 독재정권에 의한 희생은 사람들을 거리로 모이게 했고 함께 분노하고 행동하게 했다. 1987년 그로부터 30년이 흐른 지금, 우린 더 나은 세상에 살고 있는가?

‘그것이 알고 싶다’ 제작진은 또 6·10 민주항쟁 이후 활발해진 노동, 농민, 도시빈민 운동을 벌이다 희생된 사람들도 만났다.

노동조합을 만든 주동자로, 85년도 한국중공업에서 해고된 김창근 씨. 5년 만에 복직이 됐지만 IMF이후 구조조정을 이유로 2002년에 또 다시 해고된다. 사측은 민영화 반대 파업을 하는 노조원들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정당한 파업도, 요구도 그저 불법으로 치부됐다. 창근 씨의 동료 고 배달호 씨는 분신으로서 부당함에 저항했다.

박채영 씨 역시 동료를 잃었다. 본인의 권유로 택시 노조에서 함께 활동하던 고 허세욱 씨. 2007년 4월 1일 한미 FTA 협상을 중단하라며, 협상장인 서울 하얏트 호텔 앞에서 분신했다.

그의 유서엔, 본인을 위해 모금을 하지 말라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모두 다 ‘비정규직이니까’ 그들이 지키고 싶었던 건 일상의 삶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거리 위에서 부딪히며 이루어 낸 민주주의가 왜 그들에겐 희망이 되지 못한 걸까. 87년 6월의 희생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것이 알고 싶다’ 제작진은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30년 전의 바람, 여전히 우리가 꿈꾸는 민주주의의 현재도 짚어 본다.

철희씨는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끔찍한 시간을 동생을 생각하며 떠올렸다. 지난 5월 1일 노동절, 한 푼이라도 더 벌기위해 형제는 일을 나갔다. 납기일을 맞추려고 무리하게 공정이 진행된 탓에 혼재해서 이루어져선 안 될 작업들이 동시에 이뤄지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골리앗 크레인과 타워크레인이 부딪히며 임시휴게소를 덮쳤다. 짧은 휴식 틈에 일어난 사고, 이 날 사상자는 서른한 명 모두 하청업체 직원이었다. 철희 씨는 눈앞에서 동생의 사고 장면을 봤다.

끝내 동생은 목숨을 잃었다. 적은 돈으로 짧은 기간 안에 일을 끝마치기 위해 원청이 고용한 하청업체 직원들은 원청의 이윤을 위해 상주하는 위험 속에 놓여있다.

평범한 시민들의 힘으로 일군 6·10 민주항쟁, 그날 모두가 꿈꾼 민주주의는 지금 어디쯤 와있는 걸까. 부산의 6월 항쟁의 거리에서 독재타도에 맞섰던 고 이태춘 씨. 아들을 잃은 지 30년이 지난 지금, 여든 여섯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너 민주화 운동 잘했다. 우리나라 네가 죽고 나서 다 잘 되고 잘 산다”(박영옥/고 이태춘 씨 어머니)

‘그것이 알고 싶다’는 매주 토요일 저녁 11시 5분 방송된다. 연출 이광훈, 글·구성 황채영, 취재 PD 서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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